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남대총 남분 도기줄무늬 유병 (문단 편집) == 내용 == [[황남대총]] 남분에서 발견된 [[신라]]시대 화장 용기로, 연구 결과 남분이 [[남성]]의 무덤으로 확인된 관계로 이 유물 또한 당시 남성이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. 제작 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~5세기 초반(서기 300~400년대 사이)로 추정되고 있다. 같은 시기에 제작하여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[[황남대총 북분 금관]], [[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]], [[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]], [[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]], [[황남대총 북분 유리잔]],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, [[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]], 황남대총 북분 은잔, [[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]], [[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]], [[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]], 황남대총 남분 은관,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등 7만여점으로 이르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. 유병이란 향유(香油)와 머릿기름, 미안수(美顔水) 등 주로 액체 형태의 [[화장품]]을 담는 용기를 말한다. 당시 향유를 담은 병은 모두 사용할 때 조금씩 덜어 쓰기 쉽고 또 향의 증발을 막기 위해 병목을 좁게 만들었으며, 내용물이 증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유병에 뚜껑을 덮거나 종이와 헝겊으로 병 입구를 막아 사용했다. [[파일:황남대총 남분 도기줄무늬 유병3.jpg]] [[http://m.100news.kr/4225|사진 출처: 한국 화장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'코리아나 화장박물관']], [[https://prezi.com/rkw24adp3w91/presentation/|우리나라 화장의 역사]] 유병은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드는 다른 화장용기와 달리 대부분 흙으로 구운 [[도자기]]를 사용했다. 이는 온도와 습도에 민감한 내용물의 특성을 반영하여 재료가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. [[신라]]시대에는 [[토기]], [[고려]]시대에는 [[청자]], [[조선]]시대에는 [[백자]]와 [[분청사기]]로 제작했다. [[파일:황남대총 남분 도기줄무늬 유병4.jpg]] [[http://www.womentimes.co.kr/news/articleView.html?idxno=42436|사진 출처]] 신라에서는 유병 외에도 다양한 화장 용기를 사용했다. 분합(粉盒)은 형태에 넓은 뚜껑이 있는 그릇으로 유병과 더불어 화장용기 중 사용 빈도와 중요도가 가장 높다. 분합에는 가루 형태의 화장품인 백분(白粉)과 가루비누(세정제) 등을 담았다. 때때로 향을 담아 향합(香盒)으로 사용하기도 했다. 분은 하얀 피부로 가꿀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화장재료로 크게 미분(米粉)과 연분(鉛粉)으로 나뉘는데 미분은 쌀이나 분꽃씨를 가루로 만든 것으로 백분으로도 불렸다. 분항아리(粉壺)는 분합과 함께 백분이나 연지·눈썹먹 등을 담아 놓기 위해 만든 작고 오목한 그릇으로 볼과 [[입술]]에 발랐던 붉은 색조화장품인 [[연지]]를 담았다. 연지는 홍화(紅花)에서 붉은 염료를 추출해 만드는데, 가루 또는 환 형태로 만들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기름에 조금씩 개어서 사용했다. 화장품을 담는 전용 용기인 분접시(粉匙)와 분수기(粉水器)도 있었다. 현재 전국의 여러 박물관에는 다양한 형태의 신라시대 유병들이 존재하지만, 이 유병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 사용했던 것이라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